한 마리 양
- 공개되어 있는 내용이 없어 2011.9.05~2011.9.08일 직접 입력해서 올립니다.
- 입력본은 학원출판공사의 학원한국문학전집 4권입니다.
지은이
전영택
출전
?, <1959>
본문
지금으로부터 오륙백 년을 지난 옛날이야기다.
봄이다. 늦은 봄이다. 해는 거의 하늘 한가운데까지 올라왔다.
하늘에는 황새 한 마리가 높이높이 눈같이 흰 날개를 펴고 꿈결같이 날아가고, 그다음엔 종달새가 아지랑이 낀 중천에서 지저귀고 땅에는 거북이와 두꺼비가 엉기정엉기정 기고 있다. 땅 위에 보이지 않는 새 힘에 넘치는 봄이다. 양지 곁에 웅크리고 앉았던 늙은 개가 고개를 들어 푸른 하늘을 바라보다가 붉은 혀가 다 보이도록 입을 힘껏 벌려서 하품을 하고 있다.
「아…… 아, 실컷 잘 잤다.」
겨우 눈을 떠서 무심코 앞뜰을 내다보던 메리도 입을 힘껏 벌리고 두 팔을 훨씬 벌리면서 마음껏 기지개를 켜고 나서 침상에서 내려서서 물끄러미 앞을 내다본다.
환하게 넓은 앞뜰에 강한 햇살이 가득히 퍼지고 싱싱하고 눈부시게 파란 나뭇잎새에서 향기로운 늦은 봄기운이 풍겨오고 있건만 메리는 아직도 잠이 채 깨지 못하였던지 금빛 은빛 빛깔로 수를 놓고 선을 두른 자주 빛 비단 잠옷에 싸여 청춘의 물결이 흐느끼는 젊은 몸을 다시 침대에 내던진다.
「이애야, 루디아.」
이윽히 눈을 감고 있던 메리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입에 빈정대는 듯한 웃음을 띠고 나서 두어 번 손종을 울리고 나서 쇳소리로 몸종을 부른다.
자고 깬 메리는 어딘지 허전허전하고 무엇이 아쉬운 듯했다. 그럴 때는 부르는 버릇대로 몸종 루디아를 부르는 것이다.
「아가씨, 저를 부르셨어요?」
몸집이 후리후리하고 허리가 개미허리 같은 루디아는 메리 아버지가 아세아로 여행 갔다가 여덟살 아주 어린 귀염둥이 딸 메리를 위하여 선물로 사 가지고 온 종이었다. 벌써 칠년이 지나서 열다섯살이 넘으니 앞가슴이 턱 벌어지고 제법 처녀꼴이 나기 시작하였다. 허리를 구십 도나 굽히면서 대령을 하는 것이다.
「호호호호, 아가씨? 너는 아직두 날더러 아가씨라구 부르지!」
「그럼 아가씨가 아가씨지 뭐야요.」
메리는 꽤 만족한 듯이 루디아의 어깨를 또닥또닥 두들겨 준다.
「오냐, 고맙다. 여기 좀 앉아라.」
메리는 귀여운 듯이 루디아를 들여다보고 침상에 있는 교의를 가리킨다.
「황송해요, 아가씨.」
「얘 루디아, 내가 너무 늦잠을 잤지?」
「천만에요, 어서 더 천천히 주무시지요, 아가씨.」
「아아! 곤하다.」
「아가씨 얼마나 피곤하실까?」
「이애 루디아,참 좋온 때로구나. 저 초목은 힘차게 뻗어가고 꽃들은 마음껏 웃고 저 새들은 자유롭게 지저귀고…… 얼마나 좋으냐.」
메리는 중얼거리면서 다시 두 활개를 벌리고 눈을 감고 지난밤의 일을 혼자서 되풀이 하는 듯 방긋이 웃는다.
루디아는 메리의 날마다 하는 버릇대로 두 팔과 손목을 잘근잘근 주물러 주기를 시작한다.
「가만 있거라, 검둥이를 불러라.」
이윽고 메리는 소리를 지르듯 명령을 내린다. 전신 마사지를 시키려는 것이다. 루디아가 나갔다가 들어오자 곧 키 작고 뚱뚱한 검둥이 계집애가 들어와서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면서 풍만한 메리의 몸뚱어리를 함부로 두들기고 주무르고 문지르기를 약 반시간 동안이나 계속하였다. 마사지가 끝나자 루디아와 검둥이는 누워 있는 메리를 먼저 더운 수건으로 온몸을 한 번 문지른 다음에 전신에 향유와 우유를 바르기를 시작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루디아는 메리의 흐트러진 금빛 머리를 골라 빗질을 하는 것이었다.
「아아! 시원하다.」
메리는 다시 침상에서 벌떡 일어나서 체경 앞으로 가면서 중얼거린다.
「아씨 이뻐요.」
검둥이는 붉은 입술을 드러내 웃으면서 메리를 쳐다본다.
「이년아, 어서 나가거라.」
검둥이는 도망하듯 나가고 루디아만 남아서 메리의 화장을 거들고 있다.
「얘, 루디아.」
「네.」
「참말로 내가 그렇게 이쁘냐?」
「이쁘고말구요. 아가씨야말루 지금두 우리 온 나라에, 아니올시다, 온 세계에 첫손가락을 꼽히는 미인이지요.」
「참말이냐? 루디아,이쁘긴 네가 이쁘구나. 날마다 이뻐 가는구나. 갓 핀 백장미처럼 너는 날마다 무럭무럭 예뻐 가고, 나는……」
메리는 깊은 한숨을 지으면서 기울어 가는 봄을 아끼는 듯이 앞문을 열어젖히고 소파 위에 몸을 던진다.
「이 봄도 저물어가누나, 이 몸의 청춘도 저물어가지 않느냐. 흥,교회 신부님? 선생님? 다 집어치워라. 냄새나고 음산한 교회, 고리타분하고 얄미운 신부님…… 에 진절머리가 난다.」
메리는 중얼거린다.
메리는 과연 요크셔 성중에서 이름난 미인이요, 이름 높은 귀족이요, 부호이던 아버지의 유산을 받아서 또한 귀공녀요,부자로 베니스의 많은 젊은이가 가슴을 태우고 침을 홀리고 벌떼처럼 몰려들고 덤벼들고 떨어질 줄을 모르는 형편이어서 한창 경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보기두 싫은 녀석이,흥, 어림두 없다.」
웬만한 사나이는 단번에 차 버리고 차 버하다가 종내 메리나 마찬가지로 돈 많고 문벌 좋고 인물 잘나기로 유명한 청년인 헤르만이 숭리의 월계관을 쓰게 되어 두 사람은 굉장히 호화로운 결혼을 하고 나서 메리는 한동안 꿈결 같은 세월을 보냈다.
메리의 결혼생활도 꿈같이 지나가고 겨우 석 달 만에 헤르만이 유행병으로 죽었기 때문에 미망인이란 즐겁지 않은 낙인이 찍히게 되었다. 그러자 그는 참을 수 없는 고독과 슬픔에 잠겨서 날마다날마다 눈물과 짜증으로 지내기를 한 달도 못 가서 어떤 날 저녁부터 보기도 싫고 원수 같은 검은 상복을 벗어 동당이치고 사교계로 나가기를 시작하였다. 그러기를 보름이 못되어 메리는 처녀시절보다 훨씬 더 호화롭고 방종한 생활로 흐르게 되고, 그 결과 더 많은 남성이란 나비와 벌떼가 자석에 바늘처럼 달려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메리는 소파에서 다시 벌떡 일어나서 낭하[note]직지 주: 행랑, 복도와 같은 말.[/note]로 달린다. 처마에 달려 있는 조롱에 서 있는 꾀꼴새를 꺼내 가지고 달음질치듯 밖으로 나 갔다.
「아 아가씨, 어쩌실려구?」
루디아가 따라나갈 새도 없이 메리는 예쁜 꾀꼴새를 공중으로 날려보냈다.
「마님이 선물로 사주신 걸,마님이 아기처럼 애끼시는 걸!」
「호호호호, 어때? 사랑하길래 자유의 품으로 보내주는 게 아니냐. 염려 말아라.」
메리는 통쾌한 듯이 웃으면서 들어와 소파에 주저앉는다.
딱딱 딱딱.
가벼운 노크 소리가 들렸다.
「마님이십니다.」
루디아의 뒤를 따라 들어오는 사람은 아직도 늙은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무게가 있는 걸음걸이요,얼굴 모습도 아름다운 어머니 살로메였다. 천천히 일어나는 메리의 거동을 잠시 말없이 살피고 있다.
「잘 잤냐? 그런데 지난밤엔 어딜 가서 그렇게 늦었느냐? 몹시 피곤해 보이는구나? 인제 네 몸도 돌보고 이 늙은 어미 속도 너무 썩히지 않도록 해야 되지 않겠냐?j
애달픈 한숨으로 더불어 소파에 앉는다.
「어머니, 용서하세요. 저 꾀꼬리를……」
「……」
메리는 복받쳐 오르는 설움을 참지 못해서 어머니 무름에 쓰러져서 느껴 울기를 시작 한다.
「어머니, 저를 놓아주세요. 이 청춘을 어떻게 속절없이 보내요. 저는 못 살아요. 저는 답답하고 외로와서 못 살아요.」
살로메 부인은 눈을 감고 말이 없다. 이십 년이란 세월이 흘러간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는 듯 침묵에 잠겼다가 이윽고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메리야, 꾀꼬리 따위는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너는 안된다, 안돼. 나는 네 속을 잘 안다. 그렇지만 마리아 성모님께 득죄 하는 노릇을 어떻게 한단 말이냐. 안된다. 네가 어미 생각을 조금이라도 한다면 그래서 쓰겠느냐? 참말 고약한 운명이다. 엄마나 네가 이게 무슨 저주받은 운명이냐. 우리는 이 무서운 운명을 이길 길이 없구나. 모든 걸 성모님께 맡기고 참자.」
「그래두 난 몰라요, 난 아무것두 몰라요. 어머닌 어머니죠. 시대가 달라요, 그때와 지금은 시대가 달라요. 성당이나 신부나 다 거짓말이야요. 공연히 사람을 얽어매고 못 살게 구는 게지 뭐야요. 저는 다 싫어요」
소리까지 내서 흐느껴 우는 메리의 등을 어루만져 주는 어머니의 눈에 괴었던 눈물이 떨어져서 들먹이는 딸의 목덜미에 방울방울 흘렀다.
살로메도 꼭 메리의 나이에 과부가 되었던 것이다. 친정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다 극히 경건하고 완고해서 자기는 재혼이라고는 생각도 못했으나 동무들의 권유도 많았지만 남자들의 유혹을 견디어 배기기가 몹시 어려웠다. 그러나 지금은 청춘도 가 버리고 이제 얼굴에 주름살이 수두룩한 노년기에 들지 않았느냐. 자기는 이미 기울어진 운명이라 어찌할 수가 없지만, 귀여운 딸의 일이 몹시도 딱하고 불쌍하다. 그렇다고 거룩한 법을 어겨서 재혼을 하라고 버려 둘 수도 없고, 심히 난처한 일이었다.
어머니는 여러 가지로 메리를 달래고 위로 하였으나 보람이 없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우선 둘이 파리로 흑은 스위스와 이태리로 여행을 떠나기로 하여서 메리의 마음을 약간 어루만져 주었다. 그리고 아침 식사를 같이 하기로 하였다.
「기다릴 테니 곧 나오너라.」
살로메 부인은 천천히 메리의 방에서 나와 식당으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마님 얼굴 기색이 썩 좋지 못하신데요.」
「……」
이 집의 집지기 요안 늙은이였다.
살로메 부인은 고개만 설레설레 흔들었다.
「마님, 제가 다 압니다. 메리 아가씨 때문에 퍽 뇌심을 하시지요?」
아닌게아니라 그애 때문에 걱정이오.」
요안 늙은이는 메리가 나기 전부터 있어서 살림을 맡아주는 나이 칠십이 훨씬 넘은 이 집의 충복이었다. 메리의 아버지도 길러낸 조상 늙은이였기 때문에 메리의 일에 대해서는 살로메 부인이나 못지않게 걱정을 하는 것이었다. 어떤 때는 지나치게 참견을 하기 때문에 가끔 살로메 부인에게나 메리에게 핀잔을 맞는 일이 있었다. 게다가 요안은 지독한 독신자이기 때문에 살로메와 메리의 신변에 대해서 고문이요,〈대모〉격인 역할을 하려 들었다.
요안은 살로메의 뒤를 따라 식당으로 들어 와서 메리의 일로 이야기를 주고 받고 하는 동안에 약간 시간이 지나서 마침 메리가 들어왔다.
「아가씨, 안됩니다. 재혼은 안됩니다. 안드류 주교님이 아시면 큰일납니다. 그보다두 성모 마리아님이 슬퍼하십니다. 그리구 돌아가신 아버님이 슬퍼하십니다. 그리고 할아버지 할머님이 얼마나 슬퍼하실 겁니까? 메리 아가씨, 생각 좀 해보셔요.」
요안 늙은이는 이렇게 메리를 보고 타이르는 것이다. 메리는 금방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매서운 눈초리로 요안 늙은이를 노려 보던 메리는 의자에서 발딱 일어섰다.
「듣기 싫어, 늙은이 입 닫쳐요.」
다음 순간 벼락같이 달려들어 늙은이의 뺨을 갈기고 아랫종아리를 몹시 걷어찼다. 맥 없는 늙은이는 텅 소리를 내면서 마룻바닥에 쓰러졌다.
「이 귀신 같은 늙은이를 썩썩 이 집에서 내 쫓아 줘요, 꼴보기 싫어요.」
메리는 발을 구르며 발악을 하였다. 그뒤로 요안 늙은이는 앓기를 시작하여 한 주일이 못되어서,
「저주받은 집이로다. 메리는 저주를 받았으니 예수 주님과 성모님의 축복이 떠나지 마소서. 메리의 죄를 용서하소서. 성모님은 한 마리 양을 돌보소서……」
몇 마디 기도를 남기고 고요히 눈을 감았다.
메리의 밤출입은 나날이 잦아졌다. 밖에서 밤을 지내고 아침에야 들어오는 일도 예사 였다. 젊은 남자가 찾아와서 밤을 새워 속삭이다가 새벽에야 돌아가는 문 소리, 마차 소리를 듣고 살로메 부인은 이맛살을 찌푸리고 한숨을 짓기가 하루같이 계속되었다. 어머니와 같이 정양차[note]직지 주:정양靜養 곧 ‘몸과 마음을 안정하여 쉬다’.[/note]로 블란서나 스위스에 여행을 떠날 이야기도 없어지고 메리는 집에서 어머니를 대하는 일까지 피하게 되었다. 메리는 종내 어머니의 승낙도 없이 결혼을 해서 두 번째 남의 아내가 되었다.
「어여쁜 여왕의 아름다움을 내가 죽어서 연옥에서라도 차지하고야 말겠소.」
지긋지긋이 따르던 안토니는 메리의 놀라운 용모에 반하여 온갖 수단을 쓰다가 헤르만에게 패배를 당한 작자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메리 쪽에서 누가 끌어 주기를 바라는 태세를 취하고 있는 형편인데다가 문벌로 보나 메리에게는 훨씬 떨어지건만 역시 남자답고도 미려하고 게다가 흥청거리고 여자를 다루는 솜씨에 끌려서 재혼을 한 것이기 때문에 더구나 살로메 부인은 남부끄러워서 낯을 들고 나갈 수가 없다 하여 문을 닫고 외출을 안하고 성당에도 못 나가는 신세가 되었다.
메리는 제 돈을 써 가면서 남편을 따라서 날마다 술과 춤으로 세월을 보냈다. 그러는 동안에 돈을 물쓰듯 해서 많던 유산도 차차 바닥이 보이게끔 되었다.
불효 자식은 어머님을 뵈일 낯이 없사오나 돌아가겠읍니다. 이제 어머니밖에 믿을 데가 없읍니다. 저는 과연 저주받은 몸으로 돌아가겠읍니다.
——제네바에서 딸 메리
어머니와 둘이 여행을 떠나자고 작정을 했던 약속도 짓밟아 버리고 재혼한 안토니와 제네바로 여행을 가서 두번 째 부친 메리의 편지였다.
며칠 만에 돌아온 메리는 천만뜻밖에 혼잣몸이었다. 제네바 호수에서 친구들과 더불어 배를 타고 진탕 놀다가 술에 취한 끝에 다른 사람들이 싸우는 것을 말리다가 안토니가 물에 빠져서 죽었다는 것이다. 자기도 죽으려다가 동행들의 손에 붙들려서 죽지 못하고 돌아왔다는 것이다.
「저는 확실히 요안 늙은이의 말과같이 저주받은 여자랍니다. 이왕 저주를 받았으니 실컷 싸워 보렵니다. 어머니, 저는 제네바에서 죽은 줄 알고 단념하고 내버려 두세요.」
메리가 집에 돌아와 처음으로 울면서 하는 말이었다.
그런 지 몇 날을 지나서 마침 안드류 주교가 와서 특별 미사를 지내고 여러 사람의 고해성사를 받는 참이었다.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너두 주교님에게 모든 일을 고백하고 고해성사를 하여라. 다행히 주교님께서 네게 은총을 내리시면은 안 좋겠니. 그러니까 이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게 좋겠다.」
어머니는 그래도 딸의 일을 염려해서 간곡한 말로 권했으나 메리는 고개만 흔든다.
「어머니, 신부님이나 주교님이나 다 사람 이에요. 주교님은 믿을 수 있는 줄 아세요? 내나 주교님이나 죄인은 마찬가지예요, 다 더러워요. 주교님도 더러워요. 목에 십자가는 늘이고 검은 옷을 입구들 겉모양은 가장 경건한 것 같지만 속엔 더러운 게 가득 찼어요. 주교님도 돈으로 산다는 걸 어머니는 모르셔요. 그따위 인물 앞에 고백은 무슨 고백을 하구 그따위 인물에게 은총은 무슨 은총이에요.」
「이애야, 그게 무슨 소리라고 하니.」
「아니야요, 사실이에요. 왜 하필 여자에겐 더 억울하게 법을 냈어요. 왜 어째서 여자만을 얽어매는 거야요. 여잔 사람이 아니란 말이야요. 그게 무슨 저주받을 법이에요.」
어머니의 말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불을 토하듯 하면서 쓰러진다.
「어머니, 저는 어차피 성모님께 버림을 받은 자식이야요, 저는 악마의 자식이야요. 어머니, 제발 저를 좀 내버려두셔요. 기왕 어머니는 사람이면서 사람 아닌 불행한 일생을 보내셨지만 저더러 어머니의 뒤를 따르지 않는다고 걱정하실 필요는 없지 않아요.」
살로메 부인은 고개를 흔들었다가 끄덕끄덕했다가 어리둥절하였다.
「나두 모르겠다.」
메리는 또 붉은 옷을 입고 사교장으로 달려나갔다.
삼 년의 세월이 흘렀다.
살로메 부인은 견딜 수 없는 고독과 우울의 한겨울을 지내고 새봄을 맞이하여 남은 재산을 청산하고 주택을 팔아 가지고 약간의 소유 토지가 있고 한가족처럼 친히 지내는 소작인이 있다는 인연으로 인심 좋고 평화스럽다고 해서 템즈 강 상류에 있는 작은 시골로 이사를 한 뒤에 한적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몹시 무더운 여름이었다. 시골이 싫다고 런던으로 파리로 헤매고 있어서 분방과 전락의 하루하루를 지내던 메리는 몸에 중병을 얻어서 런던 어떤 호텔에 누워 있다는 소식을 들은 살로메 부인은 메리의 신상을 염려 하는 루디아를 보내서 부랴부랴 집으로 데려 왔다.
살로메 부인이 옮겨온 집이 있는 동네는 뒤와 좌우에는 이름 모를 고목들이 우거진 작은 산이 병풍처럼 둘러 있고 앞에는 개울이 사철 흐르고 있다. 그리고 바른편으로 성당이 있는 쪽을 돌아서 한 고개를 넘어서면 다시 반반한 고지가 있고, 거기에는 수목에 둘러막힌 자그마한 호수가 고요히 펼쳐 있다.
가을이 왔다.
이 시골에도 가을이 왔다.
하늘은 땅 위의 호수처럼 맑아지고 한없이 높아졌다. 동네와 시냇가에 서 있는 플라타너스나무에서는 커다란 잎이 하나 둘 떨어지기를 시작하고, 벌써 방울 같은 열매가 대롱 대롱 달리게 되었다.
어머니와 루디아의 극진한 간호의 덕으로 또 아름답고도 깨끗한 산천의 품에서 메리의 병은 많이 덜렸다.
「이렇게 좋은 고장엘 진작 왔더면 좋을 걸 그랬어요, 어머니.」
「모든 것이 성모님의 은총이다.」
메리는 동네 앞 시냇가로 산보를 하면서 속삭인다.
어떤 때는 뒷산에 있는 호숫가에까지 루디아의 손을 붙잡고 거닐게 되었다. 어느 날 석양이었다.
메리는 어머니와 루디아를 따라서 뒷동산으로 성당이 있는 언덕으로 돌아서 높은 언덕마루에까지 올라갔다.
「메리야, 이제는 성당에 가서 미사에 참여 해 볼 생각 없니?」
「……」
살로메 부인은 이렇게 조심조심 이야기를 꺼냈다.
거칠어졌던 메리의 마음이 많이 가라앉고 돌아선 것 같아서 딸을 신앙으로 돌려 보려는 생각에서였다.
「아직두 전 성당엔 갈 생각이 없어요. 저는 아직두 성당이 저렇게 내려다보여요. 여기 신부님은 모르지만 신부님은 다 마찬가지겠지요. 평안히 한평생을 시름없이 지낼 수 있는 좋은 직업이란 것밖에 저는 더 생각할 수 없어요.」
메리는 뜻밖에 이런 대답을 하고 나서 한 숨을 짓고 다시 침묵을 지킨다.
「어머니, 저는 실상 요새 내 죄를 고백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충동이 간절해요. 그래두 세상 사람에겐 고백할 생각이 없어요. 제가 제 죄를 고백할 사람은 세상에 없을거야요.」
「설마 그럴 수가 있겠냐?」
「그럼요, 제가 파리에서 얼마를 지내는 동안에 여러 신부님을 사귀어서 하나두 온전한 사람은 못 보았어요. 그들은 저를 한 마리 양으로 보지 않고 한 여성으로 보고 남달리 반반하게 생겼다는 제 얼굴을 보아요. 열이면 열 저를 한 여성으로 보고 야심을 품는 것을 보고 저는 놀랐어요.」
「설마 그럴 수가 있느냐?」
어머니는 두 번째 놀랐다.
「어머니, 그러나 사실 신부님보담 제가 더 고약한 죄인이야요. 신부님이 그렇다는 건 제가 제 얼굴을 믿고 제 교태로 유혹을 한 거야요. 신부님들이 본시 그런 게 아니라 제가 유혹했기 때문에 그랬지요. 실상은 제가 악마였지요.」
「네가 악마라니, 내 딸 네가!」
어머니는 세 번째 놀랐다.
「그래서, 제가 이런 것을 고백하구 싶어두 고백할 데가 없어요. 마리아 성모님께 직접 고백할지? 성모님께서 직접 제 고백을 들어주신다면 말이지요.」
「글째……」
어머니는 또 어리둥절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세 사람은 산마루를 다 올라가서 넘는 편짝을 향해서 걸었다.
「아가씨, 이걸 좀 보셔요.」
살로메 부인과 메리는 문득 시선을 산마루 넘는 쪽으로 돌렸다.
「저 양들을 보셔요, 저 목자를……」
맑은 호수 옆으로 양떼들이 뭉게뭉게 움직여 오고 그 앞에 목자 한 사람이 한 마리 양을 안고 가끔가끔 고개를 돌려서 양떼를 살피는 모습은 한 폭의 훌륭한 풍경화였다.
「저게 우리 세상에선 볼 수 없는 딴 세상의 모양이 아니야요!」
메리는 소리치듯 감탄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메리의 가슴에 무엇이 눌려진 것을 몰랐다.
루디아의 이야기를 들으면 —— 그가 동네 사람에게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 뒷산에는 조그만 목장이 있고 그 목장 주인이자 목자는 존 흑은 요한이란 이름보다〈하나님의 사람〉으로 알려졌고 때로는 예수로 알려졌다는 것이다.
「그 어른에겐 돈이 한푼도 없대요. 돈을 모른대요. 채소를 심어 자시구 양의 젖을 마신대요. 돌아볼 데 없는 객이 있으면 언제까지나 같이 지내구 병자가 있으면 아무리 추한 병자라도 업어다가 한자리에 자면서 돌보아 주신대요.」
메리는 루디아에게 대강 이런 말을 듣고 고개를 수없이 끄덕이고 알 수 없는 기쁨을 느꼈다. 그리고, 루디아를 데리고 가끔 목자를 찾아갔다.
「저두 병자올시다. 냄새나는 병자라고 구박하지 말아 주셔요.」
메리는 이런 말을 하고 목자 앞에 가까이 가서 허리를 굽혔다.
「무슨 병자요. 깨끗해 보이시는데요.」
「천만에요. 저는 고약한 병자랍니다.」
「네, 지금은 많이 나으셨는데요.」
메리는 목자에게 이런 말을 듣고 가뜬가뜬[note]직지 주: 1. 물건이 다루거나 쓰기에 아주 홀가분한 모양을 나타내는 말. 2. 마음이 아주 홀가분하고 상쾌한 모양을 나타내는 말.[/note]한 마음으로 돌아온 일이 있었다.
어느 날 이른 아침이었다.
산너머 호숫가에 맨발에 한편 손에는 지광이를 짚고 한편 팔에는 어린 양을 안은 목자가 서 있고, 그 발앞에 황금빛 머리털이 흐트러지고 역시 맨발에 짚으로 엮은 샌들을 신은 젊은 여자가 엎드리고 있다.
손에는 가시나무 가지가 들려 있다.
「이 낯바닥 때문에, 낯바닥 때문에……」
좌우 뺨에서 붉은 피가 흐른다. 별에 그을었으나 아직도 썩 회고 약간 여윈 듯한 목덜미에서도 피가 흐른다.
그 윤곽이 끔찍이 부드럽고 곡선이 보기 드물게 고운 어깨가 몹시 들먹이고 있다.
「낯바닥이 무슨 죄야요.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그 입에서는 가끔〈요한 아저씨〉라는 말이 들린다.
하늘의 자비와 인애가 아침 햇빛처럼 좔좔 흐르는 듯한 목자의 빛나는 눈초리는 바로 그 발앞에 엎드린 젊은 여자의 금빛 머리 위에 흐르고 있다.
목자의 얼굴과 머리 뒤에는 알 수 없는 광채가 뻗히고, 그 앞에 엎드린 젊은 여자의 좌우 어깨에는 흰 눈 같은 날개가 돋친 듯 보였다.
목자는 존 할아버지요, 젊은 여자는 메리라는 한 마리 양이었다.
몇 시간인지 모르게 긴 시간 동안,메리는 돈 한푼 소유가 없고 신부나 주교나 대주교 따위의 지위도 없는 일개 노동자인 목자에게 자기의 쌓이고 쌓인 많은 죄를 고백한 것이다.
목자는 한편 팔에 잃었던 한 마리 양을 안았고 한편에는 잃었던 한 심령이란 양을 ——보이지 않는 상한 심령을 안았다.
<19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