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
- 공개되어 있는 내용이 없어 2011.1.1~2011.7.30일 직접 입력해서 올립니다.
- 입력본은 학원출판공사의 학원한국문학전집 4권입니다.
지은이
전영택
출전
창조 3호, <1920>
본문
1
오동준은 경성 감옥에 들어간 지 벌써 거의 석 달이 되었다. 남들은 형이라 아우라 아버지라 아내라 그 가족들이 천리를 멀다 하지 않고 찾아와서 식사 차입을 한다, 옷을 들인다, 면회를 한다 하는데 들어온 지 석 달이 되도록 동준을 찾아오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무명옷 한 벌 들여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 옷에는 흰 쌀알 같은 이가 들끓었다. 그가 바라기는 어떤 친구한테서 엽서 편지라도 받아 보았으면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바람은 헛되었다. 한방의 옆에 사람에게는 편지도 오고 책도 들어오고 한복 옷과 내의도 한 달에 몇 번씩 들어오지마는 동준에게는 올 듯 올 듯하면서 종내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동준은 매일 수수밥에 된장국으로 살아가고 감방 안의 단내와 구린내로 얼굴이 누우래지고 뚱뚱 부어 살이 찐 둣하여서 아주 몰라보게 되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이것이 그리 심한 고통은 아니었다. 하루 종일 우두커니 앉아서, 눈을 감고 끝없는 공상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오직 하나의 방법이었다. 그 공상 가운데는 H와 더불어 결혼식을 하고 만주 지방으로 시베리아로 톨스토이가 농사짓고 지내던 야스나야폴야나[note]직지 주: 러시아어로 숲속의 밝은 풀밭이란 뜻[/note]까지 가 보리라는 계획도 있었다. 그래서 어떤 친구만 들어오면 러시아말 배울 만한 책을 하나 얻어서 들여보내 달라고 하리라 생각했다.
몸과 마음이 몹시 괴로운 때에는 그는 마음껏 재미있는 공상을 하고 있었다.
——내가 언제든지 나가는 날이 있으리라. 나가면 그때는 일본 동경 갔던 H가 나를 찾아보려고 돌아오리라, 아홉시 몇 분 차가 있지, 차에서 내리거던 내가 몇 해전에 동경서 처음 사랑하며 지낼 때처럼 막 끌어안고 키스를 하리라. 그리면 그는 너무 반갑기도 하려니와 옛 생각이 나서 울며 내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쓰러지리라. 그때 나는 한 팔로 그 왼손을 쥐고 한 팔로 그 등을 쓸면서 뜨거운 눈물을 그의 부드러운 목덜미에 뚝뚝 떨어뜨리리라. 그리고 한참 있다가 인력거를 타고 어느 여관으로 들어가서 나는 전신과 몸이 피곤하여 나가넘어지리라. 그때에 H는 얼른 내 옆에 와서 펄썩 주저앉고 내 머리를 들어서 자기의 무릎 위에다 올려놓으리라.
——나는 기운 없이 눈을 떠서 그의 얼굴을 슬쩍 쳐다보리라. 그때에 두 볼이 발갛고 두 눈이 큼직한 얼굴에 근심 빛이 가득해서 나를 들여다보는 것이 내 눈에 띄리라. 그리고 나는 천천히 입을 열어 지난 얘기를 하리라. H는 이따금 이맛살을 찌푸리고 가만히 앉아서 들으리라. 나는 갑자기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기를 청하리라. H가,
「어려우신데 어디를 나가세요?」
그러면 나는,
「아니 오래간만에 만났는데 같이 나가 봅시다그려.」
하고 진고개를 나가서 서양 요리집에 들어가리라.
이런 공상을 하고 앉았다가 간수가 누구를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랬다. 삼십여 명 죄수의 주의와 시선은 일시에 한 곳으로 모였다. 그런데 분명히 이천 오백 얼마라고 부르는 것 같다. 부르기는 두 사람을 불렀는데 그중 하나는 이천 오백인 것이 확실하다.
(나를 부르지 않았나? 왜 불렀나?)
처음에는 반갑더니 금방,
(아이쿠 또 왜 부르노?)
하는 생각에 그만 가슴이 두군거린다. 다시 부르면 들어 보리라고 간수를 자세히 보며 귀를 기울였다. 간수는 얼굴이 흑인종과 백인종의 반종인지 새까맣고 빼빼 말라서 광대뼈만 두드러지고 빳드락 뻗친 수염과 오똑한 코가 참 무섭게 생겼다. 머리는 희뜩희뜩 샌 것이 여러 해 동안을 간수 생활로 늙은 모양이다. 그는 늘 세상에 가장 장한 것은 관리요, 제일 귀중한 것은 법률이라 생각하고 사람이 죄를 범하면 마땅히 벌을 받을 것이요, 감옥에 들어온 사람은 모두 죄인이라고 단정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간수 노릇을 이십 년이나 하 면서도 죄수의 실수를 한 번도 용서한 일이 없다.
이러한 간수장이 싱긋싱긋 웃으면서 한 손에는 칼을 붙들고 한 손에는 무슨 종이 조각을 가지고 그것을 힐끗힐끗 들여다보면서 다시 두 사람의 이름을 부르고 불기소가 되었으니 나갈 준비를 하라고 한다. 그런데 두 사람 중 하나는 번호가 자기와 거의 같다. 그러나 동준은 아니다.
그는 전부터 있는 신경통과 기침증이 일어 나서 한참 동안이나 고통을 받았다. 기침을 한참 하고 난 뒤에는 앉은 두 무릎 위에 두 팔을 기역자로 꺾어서 뒤로 올려놓고 그 위에 얼굴을 숙여 얹은 채로 한참이나 정신을 못차렸다. 한 십 오 분이나 지난 뒤에야 겨우 머리를 들어 감방 안을 한 번 휘둘러보았다. 얼굴은 모두 폐결핵 제삼기가 된 사람처럼 누렇고 입은 해쓱하게 벌리고 눈은 아무 기운도 없이 멀겋게 뜨고 나는 죽지 못해 산다는 듯이 앉아 있다. 저 많은 사람들이 모두 다 제각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 각각 자기 생각이 제일 가치 있고 가장 긴요한 줄로 알고 자기의 문제가 가장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하리라. 그리고 각자가 다 자기의 문제만 바로 해결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리라. 또 제각기 제가 제일 심한 고통을 맛보는 줄로 알리라 —— 동준은 이런 생각을 하다가 이마를 찌푸리고 머리를 흔들면서 가늘고 힘있는 소리로 그렇지만 저희들의 문제가 무엇이 그렇게 대수로울꼬? 저희들 가운데도 나만큼 애타는 사람이 있을까? 이렇게 중얼거리다가 목이 꺾어져 내려지는 것처럼 머리를 털썩 팔 위에 떨어뜨렸다.
두 사람이 불려나간 뒤에는 고요하던 감방 안의 공기가 조금씩 움직여 냄새가 나고 뜨뜻한 바람이 두어 번 일어났다. 동준은 그 바람이나마 좀더 불어오기를 바라면서 기다리고 앉았다. 차차 시원한 바람이 좀 불어올까 하고 요행을 바라면서 기다렸다. 그러나, 그런 바람도 다시는 오지 아니하고 공기가 다 없어져 진공이 된 듯이 견딜 수 없이 답답하다. 동준은 말도 못하고 무슨 생각도 못하고 송장처럼 앉았다.
방바닥에서 단김이 물씬물씬 올라온다. 동준은 숨이 탁 막혀서 다시 머리를 기운없이 들었다.
재미있고 즐거운 공상을 해가면서 스스로 위로를 받으려고 노력하는 동준은, 마치 수목과 잡초가 무성하여 험한 산에서 예쁜 나비를 따라가던 어린애가 갑자기 벼랑에 떨어져 헤매는 것처럼 이제 무슨 초조감과 고통에 들어가기를 시작했다.
동준은 머리를 젖히고 눈을 감았다. 무릎을 베고 쳐다보는 H의 얼굴, 큼직한 두 눈에서 뜨거운 사랑이 흐르던 얼굴을 다시 보려고 아까 하던 공상을 계속하기 위해서 많이 애를 썼지만 종래 실패하고 말았다. 동준의 머리에는 참을 수 없는 고통밖에 아무것도 없다.
한참 있다가 동준은 머리를 한번 흔들고 전신에 무엇이 찔리는 듯이 몸이 흠칫 떨렸다.
—— 어떻게 되었다!
동준은 가만히 소리를 쳤다. 이것은 석 달 동안이나 생각하고 애를 쓰면서 웬일인가 웬일인가 하여 오던 커다란 의문의 해답으로 튀어나온 말이다.
동준은 다시 한 번 머리를 끄덕끄덕하면서,
「어떻게 되었다!」
하였다. 그는 다시 중얼거렸다.
「분명히 어떻게 되었다.」
세 번째는 분명히를 넣어서 자기의 판단을 옳다고 단단히 긍정하였다.
「그럼 어떻게 되었나?」
그는 새로운 의문을 발견하였다. 이 의문의 해답은 얼른 얻었다.
「마음이 변하였지, 나를 잊어버렸지, 그리고……」
동준은 차마 그 다음에는 더 생각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를 써도 마음대로 안되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
그는 입술을 깨물고 속으로 다시 말했다.
이 순간에 몹시 밉고, 무섭고, 그리고 더러운 H의 화상이 나타났다. 그것은 꼭 여성의 사탄이다. 사탄을 그리기에는 가장 적당한 모델이다. 그 화상은 어떻다고 형용할 수 없으나 손과 목에서 황금빛이 찬란한 것은 똑똑히 보였다. 그 얼굴은 몹시 예쁘기도 하면서 또한 흉악하게 미웠다.
「아! 사탄.」
그는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그 화상은 더 똑똑해지면서 꼼짝도 아니하고 섰다. H는 아 무 말도 없이 한참이나 자기를 빤히 쳐다보더니 생긋 웃고 손을 들어 번쩍번쩍하는 손가락을 본다.
동준은 안타까와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래서 감은 눈을 다시 한번 꼭 감았다. 그러나 보기 싫은 화상은 조금 흐려졌을 뿐이요, 없어지지는 않았다. 그냥 서서 자기를 바라보고 있다. 흐려졌다간 도로 아까 있던 자리에 와 서 버린다. 이번에는 희미하지만 분명히 어떤 사람과 같이 섰다.
그것은 꼭 남자인 듯싶었다.
「옳다, 다른 남자를 사랑한다!」
이렇게 소리치면서 무심중에 눈을 떴다. 그앞에는 아무것도 없다. 맞은편에 널쪽으로 한 살창이 보일 뿐이다. 눈을 뜨는 동시에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몹시 흉한 꿈을 꾸다가 깬 것같이 시원하였다. 그리고 입을 조금 방긋하면서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다. 내가 잘못 생각했다. 의심하는 것은 가장 큰 죄다. 의심하여서는 안되겠다.」
이렇게 생각할 때에 또 일어나는 의문은 역시,
「그럼 어떻게 되었나?」
하는 것이다.
「옳다, 병이 났다, 대단한 병이 났다, 입원 하였다. 아니 퇴원하여서 고적한 방에 혼자 누워서 눈물을 홀리며 울고 있다. 그렇다! 그렇다! 분명히 그렇다. 벌써 생각을 왜 못했는고? 미스 H 용서하오. 내 죄를 용서하오, 내가 여태껏 당신을 의심하였소. 제발 용서하오.」
이렇게 혼자말로 중얼거리고 자기가 의심한 것을 H가 알면 —— 병석에서 신음하는 애인이——그 마음이 어떠할까 하는 생각이 나서 동준은 새로운 고통을 느꼈다. 그 고통은 자기의 사랑이 불철저하고 약한 것을 느껴 스스로 부끄러운 생각이 났던 것이다.
어서 나가서 동경으로 가서 앓는 것을 봐 주어야겠다. 이제는 이것이 유일의 간절한 소원이요, 제일 급한 일이다. 동준이 이제 감옥에서 나가기만 하면 곧 동경을 향해 떠날 것이다. 나는 그래도 행복한 사람이다. 내가 지금은 비록 옥중에서 고생을 하지만 내게는 애인이 있다. 나를 위하여 몸과 마음을 다 바친 사람이 있다. 천하 사람을 다 제쳐놓고 나 만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그의 사랑은 완전히 내 것이다. 그의 몸도 내 것이려니와 그 의 영혼도 꼭 내 것이다. 아니 그의 전생명이 내 것이다. 그는 이렇게 생각하다가,
「아,나는 과연 행복한 사람이다.」
하고 중얼거렸다. 나는 한 생명을 가졌다. 한 사람의 생명을 진정으로 완전히 소유한 것은 전세계를 소유한 것보다 훨씬 나을 것이다. 돈도 부럽지 않다. 명예도 부럽지 않다. 학문도 부럽지 않다. 세상에는 부러울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나는 가장 귀하고 가장 아름다운 것을 가졌다. 다른 사람들이 졸연히 가지지 못하는 것을, 저마다 가지기 어려운 것을 내가 가졌다. 그러니 내가 장한 사람이다.
이런 생각은 동준이 처음으로 H의 사랑을 받고 처음으로 자기를 사랑한다는 증거를 얻었을 때에 고마움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한 사람의 생명을 얻은 것은 전세계를 얻은 것보다 낫다는 전무후무한 격언을 자기의 경험으로 얻은 것처럼 말할 기회도 아닌 것을 K라는 친구에게 말한 일이 있었다. 동준은 그 생각이 나서 씩 웃었다.
동준은 오 년 전 일을 회상하였다.
2
동준이 M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본국에 가야 별로 할일도 없이 실업자 노릇을 하면서 남에게 웃음을 사는 것보다 아무런 공부라도 더 하리라고 생각하였다.
동준은 부모가 있기는 있으나 없는 거나 다름없었다. 동준의 성이 참말 오씨인지 동준 자신도 알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는 그 부모를 참부모로 알지 아니한다. 알 수가 없었다. 동준은 어려서 아내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참말 아내가 아니라 처라고 하는 노예이다. 왜냐하면 동준은 아직 양성을 가릴 만한 지각도 나기 전에, 물론 결혼의 가장 큰 목적이요 요소인——적어도 지금 동준이 주장하는 성욕을 알지 못할 때에 다시 말하면 생식기능이 아직 발달되지 못하였을 때에 이성에 대한 애정이 생기기 전에,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한 처녀 아이를 하나 미래의 동준의 아내라는 이름으로 돈 삼십 원을 주고 사왔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 결혼 안한다고 굳이 우겼지만 할 수가 없었다. 그런즉 동준은 아내가 있어도 없는 거나 다름이 없었다. 이리하여 동준은 집이 없는 사람이다. 동경 온지 팔 년이나 되었지만 한 번도 편지가 오고가는 일이 없었고 집이라고 가본 일도 없었다. 그래서 칠팔 년 동안이나 객지에 나와서 고생을 갖가지 하면서 공부하여 졸업을 하였지만 그를 위하여 기뻐해 줄 사람이 없었다. 그러니까 동준은 졸업을 했어도 별로 기쁜 마음도 없고, 고국에 돌아가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M대학 졸업증서를 받아 가지고 돌아온 저녁에 하숙집 이층방에서 혼자 밤새도록 울었다. 그는 울면서 생각하였다.
(나를 위하여 기뻐할 자는 나요, 나를 위하여 슬퍼할 자도 나다! 나다, 나밖에 없다. 나는 나를 위하여 살아야겠다.)
제 손으로 눈물을 씻고 앞으로 할일을 생각했다.
이리하여 동준은 극단의 개인주의자가 되었다. 동준은 아무도 돌아볼 사람이 없는 제 몸을 위하여 부지런히 공부하였다. 그는 독학으로 영어를 공부하여 당시 유학생계에 한 사람도 영어하는 사람이 없는 가운데서 웬만한 원서도 보게 되고 회화도 하게 되었다. 그는 별로 통정할 만한 친구도 없었다. 집에 있을 때에도 혼자 있었고 산보를 해도 늘 혼자 했다.
그러다가 동준은 우연히 H를 만났다. 처음 만난 것은 분명히 오 년 전 사월 십오일 저녁 이었다.
세 번째 만난 날이다. 동준이 열심으로 영어를 설명하는데 H는 설명하는 말은 듣지 않고 동준의 얼굴만 쳐다보다가,
「선생님! 저는 일평생 선생님을 섬기겠어요.」
하였다. 동준은 눈이 둥그래져서,
「왜요?」
H는 두 뺨이 새빨개졌다. 그 눈에는 애원하는 듯한 빛이 보였다. 그리고 대답할 바를 몰라서 쩔쩔맸다.
「영어가 퍽 어렵다는데요!」
이것은 한참 있다가 겨우 나온 말이다. 그러고는 머리를 수그리고 책만 들여다보았다.
동준은 설명을 그치고 H의 머리와 한편 뺨과 방바닥에 닿은 한쪽 손을 번갈아 무의식적으 로 쳐다보고 있었다.
H의 머리는 가운데로 갈라서 뒤로 쪽을 찌듯 했는데 이마에 늘어진 두어 오라기 머리카락이 눈을 가리는 것을 H는 연해 치켜올리고 있었다. 주근깨가 드문드문 있는 뺨은 거무티티한 붉은 빛이 도는 것이 몹시 예뻤다. 길고도 가늘고 살이 포동포동한 손가락은 투명해서 꿰보일 듯한데 장손가락을 움짓움짓 하고 있었다.
동준은 자기의 대답이 너무 무미하고 무례하게 된 것을 후회하였다. 그리고 몹시 미안하게 생각하였다.
「어렵기는 어렵지만 부지런히 하시면 되지요. 저는 지금 좀 아는 것이 혼자 배운 것인데요, 선생 없이도 할 수 있었어요.」
이렇게 말하여 놓고는 처음에 한말 대답까지 되었을까 생각하였다. 되긴 되었지만 또 싱겁게 되었군, 속으로 생각하고 부끄러워하였다.
동준은 설명하던 것을 마저 마쳤다. 그리고 가려고 일어섰다. H는 깜짝 놀란 듯이,
「왜 가셔요?」
하고 동준을 쳐다보았다.
「조금만 더 앉았다가 가셔요.」
「가야지요.」
「앉아 말씀이나 하다 가시지요.」
동준은 겨우 한 삼십 분 앉았다가 돌아왔다. 이때 알기 어려운 H의 나이도 알았다. 더 알기 어려운 H의 마음도 대강 짐작하였다.
이튿날 동준은 또 갔다.
비가 부슬부슬 오고 사방이 고요하였다. 동준은 그동안 자기가 공부한 이야기를 했다. 남의 도움으로 공부하면서 온갖 고생을 맛본 얘기며, 한때는 사상 문제 인생 문제로 몹시 고민한 이야기며, 자기는 집이 없다는 말도 하고, 소년 시대의 단편적 기억을 얘기하다가 그의 어조는 차차 감상적이 되어 가다가 그는 갑자기 말을 그치고 두 사람은 잠시 동안 깊은 침묵에 잠겼다. 그때 다다미 (돗자리) 위에 극히 작은 것이 떨어지는, 둔한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동준의 말을 듣다가 감격해서 떨어지는 H의 눈물이었다.
〈선생님은 흑 생각 못하셨는지 모르지만 그때부터 저는 선생님을 사랑하기 시작했읍니다. 용서하십시오.〉
이런 귀절이 그후에 받은 편지 가운데 있었다.
이리하여 동준은 H라는 애인을 얻었다. H는 동준의 것이 되고 동준은 H의 것이 되었다.
그 다음해 여름에 오오구보의 어떤 집에서 한 달 동안 같이 있던 생각도 하였다. 그리고 한번은 저녁에 H와 그 친구 M이 같이 있을 때 찾아갔다. 동준이 몹시 충격을 받아서 달 아날 때에 H가 따라나와서 오오구보 들판 풀 밭에 엎드려 동준을 쓸어안고 흑흑 느끼면서 울었다. 동준은 그것을 뿌리치고 가다가 우두커니 서서 기다렸다. H는 또 따라왔다. 두 사람은 컴컴한 수림 속에서 만났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합하여 한참이나 하나가 되어 있었다. H와 자기의 심장 뛰는 소리만 심하게 들렸다.
3
먼데서부터 구두 소리가 뚜벅뚜벅 났다가 멎고 덜껑덜껑 옥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동준의 머리에 거침없이 나타나는 필름은 끊어지고 깜깜하여졌다. 네 사람이 간수 뒤를 따라나갔다. 면회하러 나가는 모양이었다.
석양이 되었다. 그러나 찌는 듯한 더위는 조금도 가시지 않고 도리어 더 덥다. 하루 종 일 삶아 놓은 공기가 음울하고 게다가 날이 음침해서 안타까와 견딜 수 없게 물컸다.
오늘 하루 해가 다 갔지만 동준을 면회하러 오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동준은 그것을 별로 슬프게도 생각지 않고 그다지 원통하게 여기지도 않는다. 옥중의 하루에서 그 시간이 몹시 길기도 하려니와 일년 중 제 일 해가 길다고 하는 칠팔월에 하루 종일 우두커니 앉아서 더위와 곤고[note]직지 주: 곤란하고 걱정스러움[/note]와 싸워 가면서 지내는 것이 과연 어렵지 아니하다고 할 수 없다. 어렵기는 꽤 어렵다. 그리고 간수의 구속과 수모도 어지간히 고통이 되어 견디기 어렵지만 그것들은 다 동준의 진실한 생명에 저촉되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H가 어떻게 되었나?〉하는 것이다. 이것이 동준의 마음을 제일 괴롭게 하는 것이다. CK목사가 면회하러 갔다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동준이 차라리 면회하러 오는 가족이 없는 자기를 다행으로 생각하였다. CK목사는 서북 지방에 이름난 목사인데 역시 이번에 만세 사건으로 들어와서 자기와 한방 한자리에 앉게 된 사람이다. 면회하러 나갈 때에는 기쁜 빛이 얼굴에 가득하였는데 들어올 때는 눈이 벌개졌다. 동준은 못 본 체하고 물어보았다.
「누가 오셨나요?」
「부인께서 오셨던가요?」
「네에.」
얼굴을 돌리면서 대답한다.
「댁에서는 다 안녕하시대요?」
목사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대답을 못한다.
「왜 그러십니까? 무슨 일이 있어요?」
「아닙니다. 별일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아내가 어린것을 데리고 왔는데, 아버지 아버지 하면서 손을 내미는 것을 보고 마음이 좋지 않아서 두 사람이 다 말을 못하고 멍하니 섰다가 들어왔읍니다. 그런데 아내가 몹시 상해서 말이 아니어요.」
「아마 밖에서 심노를 하시고 고생을 하셔서 그런가봅니다그려!」
「글쎄요.」
「어린애가 몇 살입니까?」
「이제 세 살입니다.」
「세 살 난 것이……」
두 사람의 대화는 이만하고 끝났다. 동준은 눈물을 홀리는 목사를 비웃었다. 그리고 속으로 우습게 생각하였다. 자기도 나이 많아지면 저럴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동준은 전부터 H에게 말한 것이 있었다. 사람이 결혼을 해 가지고 집을 마련하고 궤짝을 사고 사발을 사고 밥을 해먹고 잠자고 아이 낳고 그 모양으로 소위 산다는 것을 자기는 절대로 못하겠노라고 하였다. 동준은 가정이라는 것을 몹시 싫어하였다. 자유로 떠돌아다니고 마음대로 살지 못하는 것이 그에게는 제일 고통이다. 그래서 그는 결혼하기를 싫어했다. 결혼하지 않고 그냥 사랑하기를 바랬다. 사랑이라는 것은 신성한 것이지만 결혼은 인공적이요, 허위적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지난 여름에 동경서 같이 나오면서 H가,
「결혼합시다.」
할 때 동준은 웃으면서,
「결혼은 해서 무얼합니까? 꼭 결혼을 해야 되겠소? 태고적에는 결혼이라는 것이 없이도 잘만 지냈다오.」
「그럼 결혼하지 않고 언제든지 그냥 이렇게 지내잔 말이죠? 그러면 저도 좋겠어요.」
H는 장한 듯이 이렇게 말하였다. 그러나 동준을 의심하면서 한 말이다.
「그렇지만 어떻게요!」
「무얼 어떻게 한단 말이요? 베이비가 생기면 말이지요? 유모를 주거나 어떻게 기르거나 그게 무슨 걱정이지요?」
「아니.」
H는 씩 웃었다.
「아니는 무슨 아니, 좋은 수가 있으니 피임법을 연구합시다.」
「피임법은 왜 연구해요?」
「압니까? 어디서 들었소? 피임법이란 말을?」
「그걸 몰라요!」
「경험이 있는가봅니다그려!」
「아이구 망칙해라.」
「사실 그것이 문제외다.」
이런 말을 한 일이 있었다.
동준은 또 우두커니 앉았다가 한 가지 계교를 생각하였다. 손수건 좌우 끝을 젓가락으로 말아서 부채 대신 부쳐 보았다. 옆에 있던 K목사도 그대로 하였다.
감방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부슬부슬 만든다.
4
동준은 감옥에 들어간 지 꼭 백일 만에 명천지에 나와서 시원한 공기를 마시게 되었다.
밤 아홉시에 감옥문 밖에 나왔다. 이때에 같이 나온 사람이 댓 사람 되기 때문에 마중나온 사람이 옥문 밖에 수십 명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동준은 좋기는 좋지만 얼떨떨해서 한참이나 어릿어릿하였다.
(나를 위하여 온 사람은 없겠지.)
동준은 그 사람들을 보지도 않고 가려고 하는데,
「미스터 오.」
하고 등을 툭 치는 이가 있었다. 그는 동준이 나오기 한 이 주일 전부터 차입을 부쳐준 친 구 Y였다. Y는 작년 H로부터 약혼을 결정할 때에 동준이 이미 이혼한 것을 증명하고 두 사람을 위해서 끝까지 노력하였다. Y와 하루 저녁을 지내고 이튿날 새벽에 종로 청년회 위층으로 갔다.
동준은 자기가 쓰던 테이블의 서랍을 열고 뒤적뒤적하여 보았다. 아무리 찾아봐야 H의 편지는 없었다. 동경 있는 K한테도 칠월 초 순에는 나가겠다는 편지와 평양 있는 O라는 친구한테서 결혼한다는 엽서와 청첩장이 와있고, 그 외에 엽서 몇 장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보지도 않았다.
다시 한 번 찾아보다가 겨우 H의 엽서 한 장을 발견했다. 그것은 주소를 옮겼다는 간단한 사연이었다. 일부인을 보고 자기가 감옥에 들어간 다음날쯤 온 것인 줄을 알았다.
그는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전에 받아 본 묵은 편지를 가방 속에서 꺼냈다. 아무것이나 하나 집어서 읽어 보았다.
——사랑하는 낭군에게 받들어 올리나이다. 이 사이도 여행 중에 몸이나 건강하시오니까? 무슨 병이나 아니 나셨는지요. 너무 오래 소식 없사오니 궁금하고 답답하기 그지 없사옵니다. 불초한 소처는 괴로운 시간을 헛되이 보내고 있사오나 하념하시는 덕택으로 몸이 무고하와 아직까지 모진 목숨을 여전히 보존하여 가오니 염려마시옵소서. 웬일인가요? 편지 주신 지 벌 써 달포가 넘으려 하옵니다. 아무리 공부에 바쁘신들 어찌 엽서 한 장 쓰실 틈이 없사오리까? 웬일이신가요? 이제는 저를 버리시는가요? 저 같은 것은 선생님의 배우자가 될 만한 자격이 없다고 버리시렵니까? 저는 벌써 한 주일 동안이나 잠을 못잤읍니다. 어젯밤에는 꿈자리가 하도 사나와서 너무 답답하기에 학교도 그만두고 M형님하고 같이 점치는 사람을 찾아갔읍니다.
당신의 안부도 물어 보고 우리의 장래도 물어 보았읍니다. 우습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만나 뵙고 말씀드리겠읍니다. 저를 살리시려거든 속히 편지하여 주시옵소서. 저를 죽이시려거든 그만두시옵소서. 졸업하실 날도 가깝고 뵙고 싶은 생각도 간절하와 일간 그곳으로 가려고 하옵나이다. 만일 내일도 소식이 없으면 괴로운 몸을 끌면서 계신 곳을 찾아가겠읍니다. 저는 죽어도 당신 곁에서 죽겠읍니다. 어쩌면 저를 못 보실지도 모르겠읍니다. 신열은 거의 사십 도까지 되었읍니다. M형님은 저를 붙들고 울고 있읍니다. 이것이 마지막 편진지도 모르겠읍니다.
손이 떨려서 더 쓸 수가 없읍니다. 눈물이 떨어져 종이를 적시나이다. 부디부디 천금 옥체 보전하시며 내내 건강하시기를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드리나이다.
삼월 십일 소처 H올림
동준은 이 편지를 끝까지 보고 방금 받은 것처럼 마음이 몹시 감격되었다. 보던 편지는 테이블 위에 가만히 놓고 유리창 열린 데로 남산의 아침 구름을 바라보며 우두커니 섰다.
어떻게 하나 죄송, 보응, 거짓, 꿈, 돈, 곰, 사람, 여인, 운명, 사탄, 원수, 동준의 머리속에는 이런 것들이 뒤섞여서 왔다갔다 하였다.
「H는 죽었다.」
이렇게 중얼거렸다.
「죽은 H라도 가 보아야겠다.」
일본으로 떠날 것을 결심하였다. Y한테서도 H의 소식을 몰랐다. 어쨌든 일본으로 가기로 작정하고 YMCA 층층대를 내려왔다.
5
동준은 거의 일년 만에 동경역에 내렸다. 그새도 많이 변한 것 같았다. 십년이나 살고 갔지만 겨우 일년 떠나 있다가 다시 오는데도 벌써 촌사람이 된 듯싶었다. 전차에 탄 사람들이 모두 자기만 주목해 보는 것 같아서 부끄러웠다. H의 주소를 알기만 하면 곧장 그리로 찾아갈 것이지만 동준은 친구 K와 같이 들어갔다.「옮겼다는 주소로 찾아가려고 했지만 H가 만일 없으면 어떡할래요? 어서 나하고 갑시다」하고 강력하게 권하는데 못 이겨 K가 묵고 있는 하숙에 들어갔다.
동준은 그간 여러 달을 감옥에서 고생한 관계로 몸이 몹시 약해진데다가 사흘이나. 잘 자지도 못하고 긴 여행을 했기 때문에 너무 피곤해서 당일은 H를 찾아볼 기운도 없이 일찍 자고 말았다.
사흘 후 동준은 평양 있는 C에게 이런 편지를 하게 됐다.
——사랑하는 C형에게
먼젓번에 드린 글은 보셨을 듯하외다. 요새는 일 보시기에 얼마나 고생하십니까? 아우는 삼 일 전에 이곳에 와서 K군에게 괴로움을 끼치고 있나이다. 이번에 온 것은 H를 만나려고 함이외다. 감옥에서 나와 즉시 H의 소식을 알만한 사람에게 물었으나 종래 알 수 없었나이다. 동경 있다는 것 외에는. 마침 K군과 동행이 되어서 이곳을 왔읍니다. 같은 시내에 있으면서도 그 주소를 알 수 없었나이다. 종내 찾지 못하였나이다. 나는 견딜 수 없어 나중에는 경찰서까지 알아보았읍니다. 그러다가 사흘 만에 알았나이다.
이것은 사실이외다. H는 그사이 어떤 경상도 사람을 만나서 동거하더이다. 그뿐 아니라 수태한 지 오개월이나 된 것을 알았나이다.
알 수 없는 것은 세상 일이요, 믿을 수 없는 것은 사람 마음이외다.
C형이여, 나는 과연 꿈을 너무 오래 꾸었나이다. 나는 내일로 곧 돌아가서 전과 같이 춘원군이 말하는 곰이 되겠나이다. 부지런히 내가 보던 사무에 충실하겠나이다. 삼층 꼭대기 지붕밑 내 방에 돌아 가서 그럴 것이외다. 서울 가서 다시 글을 올리려 하나이다.
동경 A정에서 동준 올림
——두 번째 부친 편지 형이 주신 글은 고맙다고밖에 더할 말 이 없소이다. 졸지에서 그런 편지를 보고 놀래셨지요? 놀래게 하려고 한 것이 아니고 그것이 참말이었소. 그러면 더 점점 놀랬는지 모르지만 거기서부터는 내가 알 바가 아니오, 암만이라도 놀래시오.
셰익스피어는〈Frailty! Thy name is woman[note]직지 주: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이니라”, 고 흔히 번역하는 햄릿(Hamlet Act 1, scene 2, 142–146) 대사.[/note]〉이라고 부르짖었지만, 나는 〈Infidelity! Thy name is woman[note]직지 주: 왜 영어로 썼는지 알지 못하겠지만, “부정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이니라”, 고 번역할 수 있겠다.[/note]>이라고 부르오.
아! 형의 경우도 일경의 가치가 있소이다. 여인에게는 심장이 둘이 있읍니다. 여인은 언제부터 몰몬교를 순봉하게 되었는지요. 나를 지배하는 운명도 고약한 운명이려니와 나도 꽤 못난이었소. 이런 안타까운 괴로움과 아픈 경험을 하지 않고도 여인을 알려면 너무 많을이만큼 책이 있지 아니하오. 또 세상에 산(生)책이 매일 얼마든지 출판되지 않습니까. 신문의 삼면 기사도 그 일부이지요. 그런 것을 으례 좌우전후로 여인을 사귀어 보고 비로소 안다고야 어찌 신경이 둔하고 머리가 나쁘고 감촉이 뜬 놈이 아니겠읍니까.
하나님이 잘못하신 것이 꼭 하나 있읍니다.
여인이 아니면 인류의 생식이 되지 못하게 하신 것 말이지요.
이제 누구든지 위대한 화학자가 나와서 사람 제조기계를 발명하였으면, 그렇지 않으면 용한 생물학자가 나서 다른 방법으로 생식을 하게 하였으면 그러면 여인은 아주 쓸모없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언제나 그런 시대가 올는지요? 대해의 물도 한 방 울로 그 짠맛을 알 수 있지 않아요? 여인 하나로 능히 저들의 전체률 알 수 있어요? 그야 개중에는 춘향이같이 정조가 곧은 열부도 있기야 있겠지만 기막힌 행운 아가 아니면 일생에 한 번도 만날 수 없는 어려운 일이겠지요. 대체 우리 사람이 그런 것을 가지고 이러고 저러고 하는 것이 뭣하기는 합니다만 학자들은 아무것이나 연구하니까 심지어 풀이라, 벌레라,박테리아, 아메바 같은 것이라도 연구하니까 형과 내가 편지로 저들의 말을 하는 것도 한 학자로서는 할 만한 일이겠지요.
여인을 하나 얻어 주시겠어요? 형도 꽤 농담을 좋아하는 사람이구려. 생애에 한 번이면 그만이지요. 제발 그만두셔요! 더구나 내게는 여인은 절대 불필요해요. 나는 지금 받는 월급으로 의복, 음식을 넉넉히 살 수 있소. 거처는 나 일보는 집 사 층, 그만하면 사람의 생활은 다 되었지요. 여인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때때로 안고 자는 것이겠지요. 무얼 그따위를 안고 자지 않아도 암만이라도 살 수 있어요. 백년 내지 이백 년이라도 참을 수가 있어요. 오직 한 가지 여인이 필요되는 것은 하나님이 여인이 아니면 생식을 할 수 없게 잘못 만들어 놓으셨으니 그저 생식이나 하기 위하여 생식하는 기구로 쓰게 된다고 할 수 있으나 그러나 나 같은 사람은 자식을 낳아도 양육비가 없으니 거기에도 틀렸소, 그러면 여인은 아주 쓸데없소.
그러나, 그도 형이니까 그렇지. 어쨌든 고맙소이다. 세상놈들은 나의 시련을 보고「망할놈 온갖 간교한 수단을 다 쓰고 눈짓을 해서 남의 딸을 훔쳐 가더니 종내 실패를 했구만, 네 보아라」할 터에 형인 까닭에 여인을 얻어 주겠다는 것이지요. 좌우간 고맙긴 하지만 제발 그만두어 주시오. 싫어요. 백년 만에 한 번밖에 나오지 아니하는 처녀가 나같이 몹쓸 운명아에게 차지가 되겠읍니까. 나는 당초에 바라지도 않습니다.
여보 사람같이 못생긴 것은 없을 거요. 그만하면 넉넉할 것을 그래도 또 생각할 때도 있으니 그것은 내가 못난 탓인지도 모르겠소.
이제는 정말 그만둡시다. 말하기도 싫소이다.
때때로 글월이나 주시오. 우리끼리야 멀리 지낼 것 무어 있소.
부디 안녕히 계십시오.
고통으로 침묵한 서울 한모퉁이에서
9월 25일 아우 동준 드림
6
동준은 동경에 다녀온 지 일개월 만에 H에 게서 긴 사연으로 쓴 자백의 편지를 받았다.
상략(上略)
선생님은 저를 마음껏 저주하셔요. 여자를 끝까지 저주하셔요. 사실 저주할 물건이로소이다. 마음의 괴로움이야 얼마나 하셨사오리까만 죽은 사람의 소리로 알고 부디 저의 자백을 한번 들어 주셔요. 제가 지난 봄에 선생님을 H역에서 작별하고 들어와서는 죽 일주일 동안은 잠을 자지 못하였읍니다. 저는 잠시도 당신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었나이다. 등불 앞에 불나비였나이다. 전에는 그렇게까지 당신을 떠나기 싫은 생각었지요. 부끄러운 말입니다만 그때 제게는 성의 욕망이 힘있게 깨어서 그런지 혼자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적 막과 슬픔과 괴로움을 깊이 깊이 맛보기 시작하였읍니다. 밤마다 공연히 울었나이다. 당신이 전에 결혼하지 아니하겠다고 하신 말을 사실로 원망하고 의심하였나이다. 약혼이 되기는 했으나 그것은 당신의 본심이 아닌 것이 아닌가까지 생각하였나이다. 대체 웬일인지 알 수 없으나 저는 갑자기 높은 벼랑에서 깊은 골짜기로 떨어 진 것처럼 마음이 어둡고 약해졌나이다. 처음에는 저도 혼자서 몹시 부끄럽고 괴로와하였나이다. 그래서 울면서 하나님께 전과 같은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였나이다. 하나님도 벌써 저 같은 계 집은 돌보지 아니하시기로 작정을 하셨는지 저는 종내 두 마음을 지닌 사람이 되고 말았읍니다.
지난 봄에 작별할 때에 저는 벌써 정신병자같이 되고 히스테리가 된 것을 몹시 염려하시고 여러 가지로 위로도 하시고 훈계도 하시면서 애 많이 쓰신 생각이 나실 줄 압니다. 그후에 얼마 지나서는 당신과 영원히 헤어져야겠다는 생각이 때때로 났었읍니다. 그것이 대체 어찌된 일인지 저 자신도 알 수 없고 도대체 사람은 모를 노릇이외다. 당신과 저 사이에 어디 그럴 까닭이 털끝만큼이나 있었읍니까? 참말 생각할수록 이상해서 견딜 수가 없었지요.
어쨌든 저는 점점 더 신경질이 늘고 비관하게 되고 점점 감정적 존재가 되고 결국 마음이 답답해져서 사회의 도덕이나 세상의 습관 같은 것을 아주 잊어버리게까지 되었읍니다.
그리고 한면으로는 참을 수 없는 고독과 숨막히는 비애와 고통을 느꼈읍니다. 그러니까 저는 어떻게 시간을 보낼까 어떻게 해서 하루 해를 지낼까, 그보다도 어떻게 해서 하룻밤을 보낼까 함이 가장 어려운 일이요,커다란 고통이었읍니다. 그래서 저는 시간이라는 것이 몹시 무서웠나이다.
이때에 오직 한 가지 제게 도움이 된 것은 A와 더불어 이야기하고 먹고 산보함이었나이다. A는 저와 같이 음악학교 다닌 줄은 아실 듯하외다. 매우 쾌활하고 너글너글해서 말도 잘하였나이다. 그는 밤마다 저를 찾아와서 웃고 이야기하다가 돌아가 곤 하였나이다. 때때로 양식집에도 갔나이다. 제가 오기를 청하였나이다. 어물어물해서 시간을 보내기만 위주였으니까요.
그러니까 자연 당신께 편지할 정신도 없었지요. 한번은 제가 우연히 독감을 앓아서 사흘이나 열이 오른 채로 내리지 아니하여 아무런 정신도 차리지 못하고 있었나이다. 이때 A는 매일같이 찾아와서 극진히 간호를 해주셨나이다. 그가 제 육체에 접하기 시작한 것은 제가 처음에 신열이 몹시 올랐을 때 제 손을 쥐고 맥박을 짚어 본 것이외다. 그리고, 머리도 만져 주었나이다. 그는 밤을 새우며 불덩이 같은 제 머리에 찬물로 수건찜을 해주었나이다. 저는 아무리 남에게 허락한 몸이요, 이미 약혼 한 사람이라도 그의 간호를 거절할 수 없었나이다. 첫째는 제가 너무 괴로와서, 둘째는 너무 고마와서……
실상 거절할 정신도 없었나이다.
나흘 만에야 제 병이 쾌차하였나이다. 그것은 꼭 A의 은공과 사랑으로……
그런데 나흘째 되던 날이외다. 그가 오후에 와서 이야기하다가 머리가 몹시 아프다고 하기에 좀 눕게 하였읍니다. 석양에는 신열이 많이 나서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앓았읍니다. 저는 제가 받은 품삯으로라도 간호해 주지 않을 수 없었나이다. 더구나 그의 병이 나를 간호해 주다가 내 병이 전염되고 또한 너무 여러 날을 피곤하게 지내서 난 병이니, 목석이나 미물이 아니면 정성으로 간호해 주지 않을 수 있읍니까. 과연 저도 정성껏 간호해 주었나 이다. 밤에는 열이 사십 도가 넘어 정신을 못 차리고 앓는 것을 어떻게 그의 숙소로 가라고 할 수가 있어요, 차마 보낼 수 없었나이다. 그런 가운데 사랑이 생기고, 따라서 세상에 낯을 들지 못할 몸이 되었읍니다. 어찌 하오리까.
하략(下略)
동경에서 죄인 H드림
<1920>